1984년 한인정통장로교회의 태동

1984년 1월 1일 새해 첫날 드린 창립 주일예배. 박채곤 장로댁 지하실에서 40여 가정, 68명의 장년 성도가 모여 열린문 장로교회의 전신인 한인정통장로교회의 탄생을 알리는 창립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 첫 공동의회를 열어 차문제 목사를 담임목사로 이병인 장로와 박채곤 장로를 시무장로로 추대하였다.

차문제 목사 알링턴 예배당 1984

알링턴에 새 예배처를 마련하다

작은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모임

1월 첫 예배 후 차문제 목사는 적극적으로 새 예배처소를 찾아 두 번째 주일인 1월 8일부터 알링턴에 위치한 순복음 교단의 갈보리복음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곳에서 차 목사의 리더십과 주님의 도우심으로 교인들은 하나가 되어갔고 주일예배와 삼일 기도회 그리고 토요집회로 모이기에 힘쓰며 남녀 전도회 활동과 청년회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교회가족들은 220여명, 어린이 주일학교 학생과 중고등부 학생은 120명을 넘었다. 1986년은 성도 배가 운동과 성전 마련을 목표로 온 교회가 힘을 합했다.

차문제 목사

초기 정착 단계에서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차문제 목사는 교회를 자신의 가정보다 더 귀히 여기며 영혼을 휘어잡는 힘있는 설교로 교인들의 믿음을 세워 나갔다. 1924년 평안남도에서 3대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일제의 박해를 경험했으며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고 산으로 피신하여 1년 이상을 낮에는 성경 읽고 밤에는 기도하며 들짐승과 더불어 지내는 광야생활을 하기도 했던 차 목사는 핍박을 견딘 철저한 신앙의 소유자였다.1972년 차 목사는 주님의 이끄심에 순종하여 유서 깊은 부산 부민동 장로 교회 담임과 군산 개복동교회 담임 등 23년간의 이북과 이남에서의 목회를 정리하고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영어권 자녀들의 영적 부흥

교회 창립 초기부터 유년주일학교와 중고등부의 모임은 활발했다. 1984년 2월부터 1987년 9월까지 차문제 목사의 장남 차태욱 전도사(현 트리니티 신학교 교수)가 중고등부를 맡아 학생들은 믿음으로 성숙해 나갔다. 당시 버지니아 지역교회 청소년들의 기도모임에 활발하게 참여하며 미래의 리더들로 준비되어 갔다. 1985년 2월에는 김윤환 전도사가 그리고 1987년 7월에는 김태권 전도사가 부임하여 2세들의 성장을 도왔다.

김병원 목사 1989년

굳건한 말씀의 반석 위에 견고히 서는 교회

목자없는 양들의 서러움

1987년 차문제 목사가 건강 악화로 정상적인 목회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차문제 목사는 목회 일선에서 은퇴하고 원로 목사로 추대되면서 교회는 후임 담임목회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 동안 1987년 7월 김태권 전도사가 중고등부 담당 사역자로 새로 부임하였는데 예정대로 밑기로 한 중고등부뿐 아니라 장년 사역까지 담당하게 되어 이듬해 9월까지 교역자로 시무하며 담임목사가 없는 교회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위로 그리고 회복

1988년 8월 3일 수요일. 오매불망 고대하던 김병원 목사가 제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함으로써 교회는 지난 1년간의 담임 목사 부재라는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부임 첫날 저녁 시택 지하실에서 드린 감사예배에 모두 기쁘고 감개무량해서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에스겔 47장의 ‘은헤의 강’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며 김병원 목사는 함께 은혜의 시대로 나아갈 것을 권면하였다.

김병원 목사

1988년 8월 3일 경남 함양에서 3대째 믿는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 고신대학 학장을 역임했던 김병원 목사가 2대 담임목사로 오면서그동안 침체되었던 분위기에 새로운 영적 바람을 불러일으켜 교회는 안정 속에 커다란 변화나 혼란을 거치지 않고 차분히 지속해서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김 목사는 신학자로 논리정연하게 가르치는 달란트를 가진 분이어서 그의 복음주의 강해 설교나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통해 교인들은 그동안의 아픈 마음들을 치유받고 오묘한 진리의 말씀에 더 깊이 다가갈 수 있었다. 또한 김 목사는 워싱턴 지역 교역자들의 성경공부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육하는 교회

제3대 김태권 목사의 부임

1989년 10월, 최일영 목사가 36년간 목회한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교회인 부산 대신동교회의 초빙을 받고 14개월의 여정끝에 김병원 목사는 사임을 하고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면서 교회는 전임 전도사로, 강도사로 신실하게 교회를 섬겼던 김태권 목사를 1990년 10월 1일 공동의회를 통해 담임목사로 청빙키로 결정한다.

제자 훈련을 시작하다

1989년 10월 29일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김태권 목사의 목회 철학은 제자 훈련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1991년 1월 1일 부터 시작된 제자반은 스파르타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저녁에 모이면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성경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고 친교할 정도로 제자 훈련의 맛에 푹 빠졌다. 제자훈련과 함께 종종 성경퀴즈 대회와 작은 모임으로 주일 성경공부나 수요 성경공부도 병행하되 소수 민족으로서 정직하게 사는 삶에 대해 도전하며 구체적인 삶의 적용을 외쳤다. 또한 교회는 60세 이상의 갈렙회와 남성 바울 전도회 여성 에스더 전도회, 마가, 디모데 전도회로 교회 성장에 따른 조직 개편을 하게 되었다.

차세대를 위한 목회와 선교의 흐름

김 목사의 목회철학의 또 다른 획은 다음 세대에 있었기에 2세들을 위한 예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88년 초등부와 고등부 사역자로 부임하여 지도하고 있었던 신희령 전도사가 1991년 4월 21일 Langley High School 에서 영어권 회중 모임으로 사역을 시작하며 EM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987년 차샤론, 차로즈, 임경옥 성도가 필리핀 마닐라로 단기선교를 출발한 이래 1989년까지 단기선교를 진행하게 되었고 1989년과 1990년 멕시코 단기선교, Urbana90 선교대회에 16명의 장년 및 학생들이 참여하며 선교의 도전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990년 2월 유정웅 이미선 안수집사 가정을 파라과이에 북버지니아 첫 중장기 평신도 선교사로 처음 파송하며 파송 예배 때 와싱톤중앙장로교회의 이원상 목사의 축하와 격려가 있었다. 또한 필리핀 조용중 선교사를 비롯 후원 선교사를 늘려가게 되었고 차태광 교사, 윤조이 교사가 단기 선교로 참여하여 젊은이들의 선교가 구체화되고 있었다.

알링턴 성전에서 맥클린 성전으로

사글세 교회의 서러움을 벗다

1991년 3월, 우리교회가 빌려쓰고 있던 갈보리 복음교회에 새 목사가 부임하면서 한달안에 나가줄 것을 요구하였다. 주간활동의 제약이나 선교, 전도, 교육활동에도 많은 제약이 따랐던 터라 자체 교회 건물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당시 한어권 230여명, 영어권 70여명, 중고등부 60여명, 유년부 60여명에 이르렀는데 짧은 시간안에 예배 처소를 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우들의 삼분의 일 정도가 연대 보증을 서야 했을 정도로 눈물어린 헌신과 기도 가운데 은행 융자가 나와 맥클린에 예배당을 구매할 수 있었고 그 희생이 감사하게도 10년 후 지금의 헌던 성전으로 이사올 때 제정적인 큰 몫을 하게 되었다. 1991년 4월 21일 드디어 맥클린에 있는 새 성전에서 감격적인 입당 감사 예배를 드렸다.

차세대를 준비시키는 교회

맥클린으로 교회를 옮겨 예배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되어 오전에는 장년 예배와 주일학교 및 중고등부 예배를 따로 드리고,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에 온 가족이 함께 드리는 패밀리 워십 시간을 마련했다. 어른들과 자녀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설교도 영어와 한국어 이중 언어로 하고 찬양 자막도 이중언어를 동시에 표기하며 모두 함께 예배에 임할 수 있도록 서로 배려하였다. 당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분위기를 뛰어 넘어 기타 반주에 맞추어 복음성가도 부르게 되어 새로운 찬양 문화가 도입되는 계기도 되었다. 무엇보다도 세대간의 벽을 좁히고 언어와 문화를 뛰어 넘어 한 마음 한 뜻으로 영적가족이 되는 시간이 되었다.

북한 선교의 소명에 순종하여

김태권 목사가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고 나서 10여일 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몇 달 후에는 구소련의 해체가 시작되면서 북한의 문도 곧 열릴 것 같아 보였다. 부모님의 고향이자 자신의 마음의 고향인 북한 선교에 대한 열망이 불타 올랐고 이 문제를 놓고 나경숙 사모와 1년간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부임 2년만이고 새 성전 입당 5개월만인 1991년 9월 22일 김태권 목사는 새로운 사역지 한국으로 가게 되며 교회는 새 담임목사를 찾게 된다.

김용훈 목사 헌당예배및 위임예배 1992년

차세대를 세우고 함께 동행하는 교회

제4대 김용훈 목사 부임하다

1991년 10월에 시카고에서 33세의 김용훈 목사가 부임했다. 원래 1992년에 영어 예배 담당 교역자로 올 예정이었지만 담임 목사 청빙에 차질이 생기면서 예정보다 일찍 초청이 된 것이었다. 6개월 후 가족이 합류하기까지 매주 시카고를 오가는 생활을 했고 한어 예배와 영어 예배를 모두 인도하며 임시 담임목사의 역할을 수행하다가, 1992년 5월 10일 임시 공동의회 무기명 표결에서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제4대 담임목사로 결정되었고 그 해 12월에 헌당예배와 함께 위임 예배를 드렸다.

김용훈 목사는 비교적 부유난 불교 가정에서 자라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지만, 갑자기 17세에 가게된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에서의 거친 이민 생활과 시카고에서의 고학 생활을 거치는 중 우연히 어머니를 따라 참석한 집회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심하게 되었다. 교회와 캠퍼스 기독모임에 성령의 바람이 격렬하게 일던 그 당시 김 목사는 일리노이주 주립대학교 재학시절,많은 신앙의 친구들을 만나고, 새벽기도를 통해 기도훈련을 받으며 소그룹 성경공부반을 인도하기도 했다. 소명을 받아 1985년 1월 복음주의 학교로 널리 알려진 트리니티 신학교에 입학함으로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선교 지향적인 상호의존교회의 골격이 잡히다

김용훈 목사는 우선 영어 회중을 전담할 영어권 전담 목회자인 김형수 전도사를 세우고 한어권 장년 예배에 더욱 집중하며 선교 지향적인 상호의존교회의 골격을 다져나가게 되는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맥클린으로 이전해 올 무렵 총 출석인원이 360명 정도였는데 1996년부터 1, 2, 3부로 나뉘어 예배를 드릴만큼 성장하며 1998년에는 700명에 이르게 되었고 2001년에는 1,000명에 육박했다. 1995년 10월에는 정성일 전도사를 영어권 전임 사역자로 청빙하여 영어권 사역을 활성화 하게 된다. 200석 규모의 맥클린 성전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근처의 랭글리 고등학교를 빌려 예배를 드렸었는데 이마저도 포화 상태였기에 더 큰 예배처를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교회 번역위원회에서 두 달에 한 번씩 발행한 ‘주님과 만남’ 이라는 경건의 시간을 위한 소책자를 나누어 교인들이 매일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더 가까이 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김용훈 목사의 지도아래 체계적인 성경공부가 이루어지며 주님의 제자들이 속속 배출되어 교회 성장에 이바지할 일꾼들이 늘게 되었다. 교회학교의 체계도 잡하겼으며 사역자들도 부임하게 된다. 2001년 이후엔 김용훈 담임목사가 ‘알파의 삶’, 이경렬 목사가 ‘제자의 삶’을 그리고 ‘사역자의 삶’은 김요셉 목사가 맡아 제자 양육에 힘을 쏟았다.

차태욱 교수가 중심이 되어 북미 지역 한국계 2세들의 신앙 정립을 위해 1992년에 탄생한 Catalyst Leadership Center 라는 모임에 김용훈 목사도 다음 세대를 세우는데 합류하여 누구도 가보지 않은 거룩한 모험의 대여정이 시작되면서 열린문교회가 추구하는 상호의존교회라는 모델의 윤곽도 서서히 잡혀가기 시작했다.

‘정통’에서 ‘열린문’으로 헌던 시대를 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신명기 6:10-13

예배 예배당을 옮기며 예배드리던 시절

맥클린에서 헌던으로

한어권과 영어권에서 교인의 수가 늘어 공간이 부족하게 되었고 980석의 현대적 건물과 큰 주차장이 있던 맥클린 바이블 교회가 매물로 나왔을 때는 이 곳을 구입하기를 원했다. 성사단계에 이르렀지만 계약가의 1.5배를 제의한 카톨릭학교에 밀려 계약이 무산되며 성전매입에 관하여 다른 시각인 믿음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닳게 되었다.

그리하여 헌던의 부지가 나왔을 때엔 교인의 수로 보나 재정규모로 볼 때에 넘기 힘든 태산과 같은 것이었지만 믿음으로 추진하여 2001년 10월 1일 부지 구입을 결정하게 되었고 한어권과 영어권이 함께 격은 난관들이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허락된 일이었음을 깨달아 가는 동안 2001년 12월 드디어 현재의 부지와 건물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기존 건물주인 CSC 회사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건물에 필요한 모든 가구들을 공급하셨으니 그 당시 김용훈 목사의 마음에 주신 신명기 10장 말씀이 이루어짐을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한인정통에서 열린문으로

영어권에서느 이미 KOPC대신 cornerstone Ministry 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고 새 성전에 입주하면서 차세대를 어우르는 개명 안건이 수면위로 떠올랐고 개명의 필요성에 공감한 당회원들은 이미 원칙적인 찬성을 한 상태였다. 전 교인에게 개명 취지를 설명하고 공모하여 70여개의 이름중 세 이름이 추려졌으며 투표하여 열린문 Open Door 으로 결정하게 된다. 교회창립 18년 5개월 쯤 된 2002년 5월 26일 부터 ‘열린문장로교회’ 이름이 새겨진 주보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천막교회 체험과 입당 예배

교회를 알리는 간판도 없고 전형적인 교회 건물의 모습이 아니었는데 교회가 급속도로 부흥하며 연구실이었던 장소에 조립식 의자만 놓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모자르게 되어 본당 증축이 2003년 12월 시공 예배와 함께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공사는 2005년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였지만 그 해 5월 다른 구역 담당 소방서장이 제재를 가하여 공사중인 건물이 위험하니 예배를 드릴수 없다고 알려왔다.

이때부터 매주 이곳 저곳 호텔을 빌려 예배를 드리는 호텔 예배가 시작되었고 매번 예배장소를 알리는 공지사항부터 주차, 음향장비를 비롯하여 예배를 위한 여러 장비들을 매주일 나르고 설치하고 철거하는 일들을 반복해야 했다. 여러 제약이 따르자 지금은 주차장이 되어버린 잔디밭에 400명이 들어가는 대형 천막을 설치하였고 2005년 성탄축하예배도 천막에서 드리게 되었다.

모든 공사가 잘 진행되었지만 소방시설 점검에 차질이 생기며 입주가 미루어 졌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릴 때 주님께서 역사하심으로 마침내 2006년 1월 15일 새 성전에서 첫 주일 예배를 드리고 2월 12일 입당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 진정한 헌던 시대의 새 막이 열렸다.

상호의존형 교회의 모델을 실현하다

차세대 교회의 주역, 영어권 회중과 차태형 목사

1998년 11월 8일 정성일 전도사 후임으로 고 차문제 목사의 막내 아들인 차태형(John Cha) 전도사가 영어권 담임목회자가 되면서 영어권은 계속 부흥해 갔고 Cornerstone Ministry 이름으로 자립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발전해 나갔다. 2002년 교회명 개명에 영어권도 동의하여 ODPC라는 한 교회 아래 EC(English Congregation)와 한어권 KC 두 회중이 연합하면서 각 회중을 섬기는 교역자들이 따로 있는 형태로 발전했다. 이리하여, ‘An Open Door to a Life Changing Grace (삶을 변화시키는 은혜로 이끄는 열린 문)’ 이란 비전을 공유하며 함께 단기선교팀을 파송하고 주일학교 운영에 동참하는 상호의존교회로 나가는 실제적인 초석을 놓게 되었다. 이를 통해 한어권 목회자와 리더들과의 협력 뿐만 아니라 1세들의 희생과 신뢰를 통해 연합과 평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2010년 1월 24일에는 세명의 영어권 장로를 세우며 당회를 결성하여 교회운영에 한어권 교회와 함께 협력하는 체제가 되었다

또한 2011년 12월 11일 ‘상호의존교회’ 내규 수정안을 정식으로 통과시켜 명문화했다. 상호의존교회는 한어권 회중과 영어권 회중이 서로 독립적으로 재정과 목회를 운영하지만, 열린문 장로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서로 도우며 의존하여 섬김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에 이것을 법적 그리고 구조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교회내규를 수정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공동의회, 당회, 여러 사역원이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되지만 ‘연합 공동의회’와 ‘연합 당회’가 새로이 조직되어 교회의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런 형태의 모습을 갖춘 이민 교회가 없었기에, 이 일은 한인 이민 교회사 뿐 아니라 타민족 이민 교회사에서도 획기적인 일로 평가받을 만하다. 김용훈 목사는 열린문장로교회가 상호의존교회라는 모델의 첫번째 '샘플'이지 상호의존교회의 '모델'로 규정하지는 않으며 앞으로 꽃 피울 여지가 많고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영어권 새 성전 짓다

한어권과 영어권의 부흥으로 비좁은 주차 공간과 두 회중이 같은 건물에서 제한된 예배실들을 나눠 쓰는데 많은 어려움과 불편함이 불거지면서 주차장 확대 공사와 영어권을 위한 건물 건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2010년 6월 18일 기공식을 하면서 새 성전과 주차장 공사가 시작되었고 1년후인 2011년 6월 19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차장 공사 완료 및 영어권 새 성전 입당 감사 예배를 드리는 기쁨을 맛보았다. Worship Center 로 명명한 예배당은 500명을 수영하며 다용도로 사용 가능하도록 설계 건축되었고 사시사철 푸른 인조 잔디를 사이에 두고 한어권 예배당과 마주하고 있도록 설계되어 상호의존교회를 상징하도록 하였다.

상호의존교회의 비전을 향하여

상호의존교회 컨퍼런스, 이민 세대가 함께 하는 교회의 미래

2012년 10월에 열린문교회는 목회 신학적인 입장에서 다루어지던 상호의존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첫번째 컨퍼런스를 열었다. Interdependent, Intergeneration, Intercultural의 첫 자를 딴 2012 i3 summit 이었다. 30년의 인내와 협력으로 일군 상호의존교회의 의미를 다른 이민교회에 나누고자 하는 소박하지만 큰 획을 긋는 중요한 행사였다. 캐나다 토론토, 시카고, 뉴욕 등지의 한인교회에서 참여한 컨퍼런스는 김용훈 목사와 차태형 목사가 20여 년간 상호의존교회를 지향했던 목회를 통해 체득한 실질적인 교훈을 공유하고, 트리니티 신학교의 피터 차 교수가 성경적인 면과 신학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이루어야 할 기초를 확인해 주어 상호의존교회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목회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십자가의 은혜에서 그 은혜가 흐르는 공동체로

열린문장로교회의 예배에서 은혜를 빼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용훈 목사의 설교에서 십자가를 배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김용훈 목사의 설교의 접근점은 성도들이 십자가의 감격이 마르지 않아야 한다는 확신 가운데 시작된다. 그 은혜와 십자가가 강조되면서 열린문 사역의 방향도 흘러 간다.

김용훈 목사는 섬김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인가를 확인하라고 도전한다.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누구를 섬기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열린문장로교회 사역의 DNA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섬김이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곳에서 하나님이 주신 역할로 최선을 다하고 감사하며 섬길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예배와 기도회, 오이코스 모임 그리고 지역사회 참여를 통해 은혜가 이끄는 교회로써 지역 사회와 열방으로 그 은혜가 흘러가기를 사모한다.

받은 은혜에 대한 것이 희미해지면 교회가 교만해지고 세속화됨을 역사 속에서 기억한다. 열리문교회의 30년 후를 바라보며 지난 30년을 이끌어 주신 은혜를 잊지 말자는 헌신과 다짐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만 살아가기를 소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 시대의 '빌라델비아 열리문'으로 쓰시리라.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요한계시록 3:8)
SMC 중고등부 센터 SMC 입당예배 '16